역사속의 발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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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무기발명가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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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영주(永州 :지금의 영천)이며, 광흥창사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아들 최해산(崔海山)과 손자 최공손(崔功孫)도 화약과 화기의 연구에 참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으로 제작하고 사용하였다. 그는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 유황, 분탄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초석을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중국에서는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에게 배워 결국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에 대해 연구하고 또 그것들을 만들 수 있도록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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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의 건의 끝에 허락을 받아 1377년부터 화약과 무기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화통도감에서 만들어진 각종 화기들은 18가지인데, 이들은 총포류, 발사물, 주화로 분류할 수 있다. 1380년 왜구가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원수 나세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적을 무찔렀다.

저서로 《화약수련법》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한글창제, 훈민정음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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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7(태조 6)~1450(세종 32). 조선 제4대왕. 재위 1418~1450년.

세종 임금은 우리 역사에서 뿐 아니라, 세계 인류 역사에도 드물게 보는 위인이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정사를 보살피면서 독서와 사색에 머리 쓰기를 쉬지 않았으며, 의지가 굳어서 옳다고 생각한 일은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기어코 실행하였다. 널리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본위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1420년 집현전을 설치, 1421년 도성을 개축하는 한편, 1426년 나이가 젊고 재주 있는 문신을 뽑아 사가독서하게 했고, 이듬해 태배법을 철폐, 1433년 최윤덕을 북변에 보내어 파저강의 야인을 정벌, 1437년 김종서로 하여금 두만강 방면에 6진을 설치하게 했다.

이 밖에 수재, 한발로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 태조의 "경제육전"을 따라 "속육전" 및 "육전등록"을 편찬, 도천법을 설치하여 숨은 인재의 등용에 진력했고, "농사직설"을 편찬 반포하게 하여 농업 발전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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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반포하는 한편 정음청을 두어 유교 전적, 음운서 등의 국문 출간을 담당하게 했으며, 학문의 장려에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 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서적의 간행에 따라 활자, 인쇄술의 개량,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의 동활자가 주조되고 국문 활자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기를 개조하여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등 저명한 악곡을 제작하게 하였다.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일구, 앙부일구, 자격루, 누호, 일성정시의 등 천문 기계를 제작하게 했으며,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하였다.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등 역서를 짓게 했고,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여 세계 최초로 우량을 측정하게 했다. 농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공법의 제정에 의한 전세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진력했다.

조선 세종때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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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현 관기의 소생이나, 과학적인 재능이 뛰어나 1423년 발탁되어 노예신분을 벗었다.

그 후 행사직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에는 호군에 올랐으며, 혼천의 제작을 완성했다. 이듬해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감독하는 한편,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 완성했다.

이후 천체관측용의 대·소간의, 해시계인 천평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및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는 규표 등을 제작, 감독했다.

특히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파면당했다.

조선 선조때의 명장 이순신(李舜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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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 1545(인조1)~1611(선조 31) 조선 선조때의 명장. 자는 여해, 병조참의 거의 증손, 정의 아들.

1579년 무과에 급제,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5년 사복시주부, 조산보만호, 1589년 선전관, 정읍현감을 역임하는 등 미관말직만을 지내다가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확충에 전력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옥포에서 적 수군 선견부대 30여척을 격파,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13척을 분쇄,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에 승품되고, 7월 한산도에서 적선 70여 척을 무찔러 정헌대부에 올랐다.

다시 가토의 수군을 안골포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인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고,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후 최초의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 수군의 전진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초래케 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의 생업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쓰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변호로 권율의 막하에 백의종군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철수하는 적선 500척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다 혼전 중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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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을 장악했고,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탱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이 되고, 풍덕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 1613년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는 아산의 어라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 시호는 충무공이다.

허준 조선 선조 임금 때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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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청원, 호는 구암이며 김포 출신이다.

29세 때 과거에 합격하고 의관이 되어 내의원(궁중에 설치된 병원)에 근무하면서 뛰어난 의술을 인정받아 뒤에 선조 임금의 어의(주치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어의로서 의주로 피난가는 선조 임금을 보살펴 그 공으로 호종공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1610년에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의학서적을 종합하여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 여러 나라에 알려졌고,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한의학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밖의 한의학 저서로는《신찬벽온방》《벽역신방》《언해구급방》《언해두창집요》《언해태산집요》등이 있다.

배다리(舟橋) 준공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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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배다리(舟橋) 준공

1792년 수찬으로 재직시 서양식축조법을 기초로하여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중인 수원성의 수축에 기여했다.

중농주의, 중상주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과학기술저서 '마과회통', '의령' 등 서양축조법을 기초로 '성제, 기중가설을 저설, 수원성축성에 기여했다. 1789년 급제, 병조참의, 규장각부사직 등을 거침 거치고 1801년 신요박해 때 강진으로 유배했다.

여러개의 활차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올리도록 고안한 정약용의 거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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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업적 뒤에는 정조의 신뢰가 있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거기에 성(화성)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도시'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죽어 간 아버지를 새롭게 이장하고 그곳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또 매년 참배하는 것에는 할아버지(영조) 때부터 실시해 온 탕평정치를 정착하여 망국적 당쟁을 일소하고자 하는 정조의 포부가 담겨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정조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는데는 다산처럼 자신과 개혁적 성향을 함께하면서도 과학기술에 능통한 관리가 필요하였습니다.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여기엔 배로 만든 다리(舟橋)가 필요하였습니다. 한강 폭만큼의 선박을 가로로 이어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수백명의 행렬이 지나가도록 배다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용은 둘째치고 안전상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조의 왕조개혁 구상과 직결된 배다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낸 다산은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됩니다. 배다리에 이어 다산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사업은 화성(수원성) 축조이다.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던 중이던 다산은 정조로부터 화성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고 기존의 조선과 중국(청나라)의 성제를 바탕으로 벽돌을 이용하고, 성벽의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독창성을 발휘해 좀 더 선진화된 성제를 보여주게 됩니다. 또 정조가 직접 하사한 책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여 거중기를 설계하여 4만냥 이상을 절약하고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 신하를 따뜻이 보살펴 주었던 정조와 다산의 아름다운 만남은 아깝게도 당쟁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막혀 결실을 맺지는 못합니다.

거중기: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사용하던 기계. 조선시대 정조 때에 수원성곽을 쌓는 데 사용되었으며, 정약용(丁若鏞)의 《기중도설 起重圖說》에는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는데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체를 들어올리게끔 되어 있다. 거중기는 여러 개의 활차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올리도록 고안한 장치이다. 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체를 달아매고,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올려지도록 했다.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5000근이나 되는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조선 말기의 지리학자겸 실학자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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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동산에 올라가 그림그리기와 지도를 만들곤 했다. 우리나라의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김정호는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 조선8도를 3번이나 돌아보았다.

그리하여 조선조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하였다. 1834년 '청구도', 1861년 '대동여지도', '16만2천분의1 축척, 절첩식' 제작, '대동지지', '지구도' 제작, '청구도', '대동여지도' 제작 및 '대동지지' 저술로 조선조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 하였다.

이제마 1838~1900 (한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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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의학연구와 제자들의 교육으로 보냈다. 기질과 성격의 차이에 따라 인간을 4가지로 나누고 그에 적합한 치료 방법을 제시한 사상의학을 확립하였다. 사상체질의학(四象體質醫學)을 창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의사학상(醫史學上) 불후(不朽)의 자취를 남긴 조선말기의 한의학자다.

이제마의 호는 동무(東武)이며, 전주이씨 안원대군(全州李氏 安原大君)의 19대 손으로 함경남도 함주군(지금의 함흥) 평서면에서 진사(進士) 이반오(李攀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심오한 철학관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연구로 명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통해 사상체질의학을 체계화함으로써 한의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으며, 오늘의 한의학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우한 운명을 타고나 국운이 쇠퇴한 어려운 시대를 살았으나, 타고난 총명성으로 일찍이 경서(經書)를 통독하고, 어려서부터 무예(武藝)를 좋아했으며, 평소 특이한 지병으로 의학과 역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경향각지를 주유(周遊)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배움에 힘썼다.

1875년(39세) 무과(武科)에 등용되어 1876년 무위장(武衛將)에 제수되었으며, 1880년(44세)부터 1893년까지 선생의 철학적 세계관이 담긴 『격치고 (格致藁)』3편을 저술했다. 1886년(50세) 진해현감(鎭海縣監)에 임명되었으며, 1894년(58세) 불후의 명작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저술했다.

1896년(60세) 최문환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제수되고 이듬해 고원군수로 전임되었으나, 1898년 모든 관직에서 사퇴한 후 보원국(補元國)이라는 한의원을 개설하고, 축적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1900년 일생을 마칠때까지 『동의수세보원』의 퇴고(推敲) 를 계속했다.

선생은 『동의수세보원』으로 천명된 사상체질의학(四象體質醫學)을 창시함으로써 한의학에 새 지평을 열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의학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인간을 자연에 순응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능동적 자세로 전환시켜 놓았다.

사상체질의학을 간략히 요약하면, 사람의 체질을 오장육부의 대소와 성정(性情)의 차이에 따라 태양인(太陽人), 태음인(太陰人), 소양인(少陽人), 소음인(少陰人)의 4종류로 나누며, 같은 병이라도 병증보다는 환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해야한다는 이론으로 임상학적(臨床學的)인 방법에 따라 질병의 예방과 치료 및 양생(養生)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밖에 저서로는『천유초(闡幽抄)』,『제중신편(濟衆新編)』등이 있다.

지석영 1855~1935 의사. 문신. 국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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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1935 의사. 문신. 국문학자.

자 공윤(公胤). 호 송촌(松村) 본관 충주(忠州).

서울 출신.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를 실시.

1880년(고종17) 일본에 가서 두묘(痘苗)의 제조법과 독우(犢牛) 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돌아왔고, 일본 공사관 의관 (醫官)으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82년 전주와 공주에도 각 각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고, 99년 경성의학교 교장에 취임 하였다. 또한 한글 보급에도 힘써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 <자전 석요(字典釋要)>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씨없는 수박 개발 농학자 우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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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광무 2)~1959 농학자.

일본 도오꾜오 출생.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한 범선(範善)의 아들. 1919년 도오꾜오 제국대학 농학과 졸업. 모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 농업연구소장에 취임했다. 육종 학 연구에 전심, 재소 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했고, 씨없는 수박의 개발로 유명하다. 문화포장을 받았다.

저서 '십자화과 식물체 속의 계놈 분석과 유체의 합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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